푸른길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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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조상현
SUBJECT   서안사변, 중국 근현대사를 바꾸다-공산당 생존의 비밀
  

 1936년 12월 12일에 발생한 서안(西安·시안) 사변은 중국 공산당을 벼랑 끝에서 구해내면서 중국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이다. 

 시안사변이 일어난 뒤 긴박했던 13일 동안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장개석과 모택동이 손을 잡았다.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전면 항일전으로 180도 물꼬를 틀었다. 일본은 1937년 선전포고 없이 중일전쟁을 결행했다. 8년 전쟁의 서막이었다.  

 어째서 이런 황당한 일들이 일어났을까. 만주 땅을 선뜻 내주며 일본을 피했던 장개석이 왜 갑자기 결사 항전을 택했을까. 이런 의문들은 하나 하나 풀어가보자. 당시 상황을 복기하면서...

 공산당은 5차에 걸친 국민당의 대규모 토벌전에 쫓겨다니면서도 간신히 명줄을 유지하는 형국이었다.

 대장정을 통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기진맥진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이런 공산당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는, 장개석의 6차 초공전 직전 시안사변이 터졌다. 중국 공산당은 정말 멸망 직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이다.
 
 시안사변이 일어난 배경은 이렇다.

 장제스가 북벌전쟁에 승리한 뒤 국민당이 공산당과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는 동안 만주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장제스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면서 일본군의 만주 침략을 묵인하는 전략으로 썼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면서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노골화했다. 장제스는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서 만주의 군벌 장학량에게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지 말고 화북지방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한다.  

 일본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만주를 5개월만에 집어삼킨다.  

 당시 장제스의 전략은 이랬다. 외세를 물리치기 전에 필히 집안을 먼저 다스려야 한다(攘外必先安内)는 전술이다. 장제스는 이 대목에서 “일본군은 피부병이지만 공산당은 심장병”이라며 유명한 말을 남긴다.

 공산당을 박멸하는 초공전을 벌이는 와중에 만주에서 일본과 전쟁을 병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대외용이고 사실 장개석은 일본을 무서워했다. 일본의 막강한 전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일본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그의 파산은 불가피하고 결국 권좌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는 아마도 청나라 말기 실권자 이홍장이 청일전쟁에서 그의 권력 기반인 북양군대를 모조리 잃어버리고 권력마저 빼앗긴 역사를 상기했을 것이다.

 장제스는 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해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외교적인 조치만으로 대응했다.

 장제스 개인과 그의 권력유지를 위한 것이지만 중국과 중국 인민대중의 의사를 무시한 처사였다. 이때부터 장제스는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비난을 듣기 시작했다.
 
 일본이 만주에서 터를 잡는 동안 장제스는 오직 공산당 박멸에만 집중한다. 국민당의 초공작전에 밀려 1934년 10월 홍군은 중화 소비에트 임시수도인 루이진(瑞金)을 포기하고 도주했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공산당은 길고 긴 고난의 행군에 나선다. 이른바 대장정이다. 섬서성 황토고원의 오지로 오지로 도망가 결국 옌안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는다.

 1936년 장제스는 장정을 끝내고 옌안을 수도로 삼은 공산당 세력을 끝장 내기로 결심한다. 이 당시 공산당과 직접 맞서 교전했던 세력이 장학량의 군대였다.

 장제스는 홍군 섬멸전에 승부수를 던졌지만 최전선에 있던 장학량은 차일피일 일전을 미루고 있었다. 장학량의 장제스와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내전을 중지하고 만주를 점령한 일본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공산당도 긴밀하게 움직였다. 장학량의 심중을 꿰뚫어 본 것이다. 홍군은 비밀리에 장학량에게 공산당과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하자고 설득했다. 실제로 장학량은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 마오쩌둥의 홍군을 우군으로 생각했다. 홍군 간부가 비공개로 장쉐량 군대에 와서 강연을 하고 교육을 시킬 정도였다.

 공산당을 끝장내려는 장개석 역시 급했다. 장학량에 연일 홍군과의 전쟁 개시를 명령하면서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장학량은 움직이지 않았다.

장학량은 1936년 12월 12일 드디어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

 공산당에 6차 대규모 토벌전을 독려하러 직접 시안까지 날아 온 장제스를 전격 감금한 것이다. 새벽 동이 트기 직전 경호원들을 사살하고 뒷산으로 도망간 장제스를 체포했다. 이른바 시안사건이 터진 것이다.

 당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36년 12월 12일 새벽 6시. 동북군벌 장학량은 제 17로군(서북군) 양호성과 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동북군 1개사단과 서북군 1개연대를 동원하여 중앙군을 급습하여 무장 해제시키고 장개석 숙소를 포위했다. 장개석은 비서와 함께 도주했으나 산속에서 사로 잡힌다. 그의 참모들과 남의사 요원들도 모두 체포된다.

 장학량은 읍소을 하면서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국내 각 정파의 힘을 합쳐서 일본에 맞서자고 호소했다. 이른바 장학량의 병간(兵諫·군대로 위협하며 설득함)이었다. 속옷 차림으로 도주했다가 잡혀 온 감금된 장제스에게 8개항을 요구했다.

 1. 남경 국민당 정부를 개편하고 각당 각파의 인사를 참여하게 할 것

 2. 내전을 중지하고 무장항일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해 항일구국회의 지도자를 즉각 석방할 것

 4. 전국의 정치범을 석방할 것

 5. 집회, 결사 등 모든 자유를 보장할 것

 6. 국민의 애국적 조직활동과 정치적 자유권을 보장할 것

 7. 손문의 유지를 실천할 것

 8. 구국회의를 소집할 것
 

 시안사변이 터지자 국민당은 물론 공산당과 각 지역의 군벌 심지어 소련의 스탈린까지 막후에서 긴박하게 움직였다.  

 국민당 총사령관 장제스의 신병 처리가 핵심 사안으로 떠올랐다.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보자.

 제29군 사령관 송철원, 한복구를 비롯한 화북군벌들과 동북, 서북군 장교들은 모두 장개석을 처형하자고 주장했다. 산서군벌 염석산과 풍옥상은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광서군벌 이종인, 사천군벌 류상도 장개석 처형을 지지했다. 장개석만 제거되면 그동안 누렸던 자신들의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장개석이 이끄는 남경 정부도 둘로 갈라졌다. 최측근으로 꼽히는 하응흠, 대계도, 왕정위 등은 장개석이 어찌되건 무조건 토벌을 주장했다.
 
장학량과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송은 장학량을 설득해 남편의 목숨을 구한다

 장개석의 처인 송미령과 매형 송자문 등 일부만 장개석 구출이 우선이라고 반박했다. 장개석의 처와 처가를 제외하고 그의 최측근들마저 장개석 이후의 자리만을 생각한 흔적이 많다. 장개석으로선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장학량은 연안의 중국공산당에 협조 급전을 보냈다. 공산당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내 급진파들은 장개석에 대한 원한을 상기하며 인민재판에 올려 처형하자고 요구했다.

 다만 모택동은 냉철하게 사태를 바라봤다. 아직은 장개석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주은래를 서안으로 급파했다. 모스크바의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추이를 지켜봤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장개석이 죽으면 중국은 분열될 것이고 국민당내 2인자 왕정위의 친일내각이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 국민당이 일본과 합작하면 소련으로선 위협이다. 따라서 장개석을 살리는 것이 소련에 유리하다’.

 이런 속셈으로 소련은 장개석의 석방과 평화적 해결을 지지했다. 주은래는 장개석과 단독회담을 가진 후 5개항을 요구했다.

 1. 국민당 정부의 개편, 친일파 숙청, 항일세력 영입

 2. 토공(공산당 탄압)정책 중지

 3. 연합구국회의 소집과 항일구국노선의 결정

 4. 우방국과의 항일연합전선의 형성

 5. 섬서의 중앙군은 밖으로 철수하고 서북 각성은 장학량, 양호성이 통치

 장개석은 가타부타 얘기하지 않고 “노력해보겠다”고만 했다. 담판은 결렬되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송미령이 도착하여 장개석을 설득함에 따라 결국 양측은 막판에 합의한다.

 이 합의는 공식 문서 없는 구두 약속이었다. 장개석의 “나를 믿으라”라는 말 한마디로 결정됐다. 그 세부적 내용은 일절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장개석은 장학량, 양호성 두 사람의 호위하에 12월 26일 남경으로 돌아온다. 장개석은 자신의 약속을 지켰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진다.

 공개적으로는 결코 친일반공, 선내후외의 방침을 바꾼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애매하게 비공식적으로 친일파 추방, 국공합작의 형태를 취함으로서 장개석은 자신의 체면도 유지하면서 약속도 지키는 중국식 타협이 이뤄진 것이다.

 그럼 장학량 왜 서안사변을 일으켰는가. 장학량이 순수한 애국심에서 병간을 일으켰다고 볼수는 없다.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다. 벼랑끝으로 몰리자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다.

 만주는 장학량의 고향이자 근거지였다. 그곳을 일본에게 쉽게 내주었고, 일본은 이제 화북지방까지 넘보고 있다. 자신의 근거지를 빼앗긴 채 장제스의 부하로 전락한 상황에 그는 위기감과 모멸감마저 느꼈다. 일본군을 쫓아내지 않으면 장제스 밑에서 영원히 2인자로 끝날 운명임을 직감한 것이다.

 서안사변이 소련의 음모라는 설도 있다. 결과론적으로 중국의 전면전인 항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동부전선, 즉 대독일 전쟁에 몰두할 수 있었다. 소련이 한시름을 놓은 것은 사실이다. 소련이 분명 수혜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최대의 수혜자는 따로 있었다. 바로 중국 공산당이다. 그동안 공산당은 5차에 걸친 국민당의 대규모 토벌전에 쫓겨다니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텼다. 대장정을 통해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기진맥진 탈진한 상태였다.

 시안사변이 없었다면 장개석은 6차 초공전에 나설 참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정말 멸망 직전에 놓여있었다. 공산당 정권은 이렇게 살아남았다. 천운이었다.

 공산당은 항일전쟁 기간동안 철저히 전투는 피하면서 세력을 온존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1936년에 3개 사단 2만의 병력이 45년 8월에는 150만의 병력으로 늘어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장개석은 정말 일본군과의 전쟁을 피하고 싶었다. 젊어서 일본군의 사병으로 근무했던 경력이 있던 장개석은 일본의 가공할 군사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시안사변 때문에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항일전에 내몰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장개석은 당시 자신의 일기에서 “3년에서 5년만 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적었다.

 그는 독일 등에서 적극적으로 무기를 구매하고 있었고 선진 군사교리를 배우기 위해 수많은 유학생을 파견한 상태였다. 강력한 일본 항공력에 맞서기 위해 공군 전략을 키우는 중이었다.

 전쟁 초기 장개석의 불길한 예언은 맞았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화북의 보정전투, 석가장 전투에서 장개석은 직속의 최정예 사단 4개를 파견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양측의 전력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오송전역에서는 총력을 다해 3개월간 전국에서 약 80만명을 투입했으나 5천명에 불과한 해군 육전대조차 밀어내는데 실패했다.

 일본군은 중포와 제공권, 함대의 함포사격을 통해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일본 증원군이 배후에 상륙하자 중국군은 붕괴된다. 여기서 중국군은 30만명의 사상자를 냈고 일본군은 4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어이없는 참패지만 예견된 결과였다.

 하지만 대륙에서 쫓겨난 장개석은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로 폄하된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 중국 대륙에서도 항일을 이끈 애국자로서 다시 평가받고 있다.

 중국군은 최정예 부대조차도 일본과 상대가 안됐다. 공군은 막 육성되기 시작한데다 소형경비정으로만 구성된 해군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몇척의 독일제 잠수함만이 쓸만했지만 승무원들은 기초 지식 정도만 갖고 있었다.

 남경정부는 중일전쟁 직전에 중원대전과 양광사변에서 재정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직후였다. 그 회복에 수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 본토조차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항일전쟁은 개전됐다.

 중국은 소련처럼 단 한명의 권력자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뭉친 것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의 수많은 군벌들의 연합전선에 불과했다.

 장개석의 명령은 언제라도 무시되기 일쑤였다.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장개석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봐야한다. 8년을 끌며 결국에는 중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항일전에서 보인 장개석의 불굴의 의지와 그 지도력은 재평가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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