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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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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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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 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는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뚤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김용택 시인의 마지막 수업
▲ 가는 사람은 아쉽고 보내는 사람은 서럽다.
김용택(60)시인은 덕치초등학교 제자들과 마지막 수업을 마친 뒤 한명씩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꼭 껴안았다.마지막 수업을 앞둔 노(老)교사는 한동안 교정(校庭)을 서성였다. “사흘 전부터 잠을 자지 못했다니까요.” 그는 걸쭉한 남도 사투리로 불안함을 전했다. 여유로운 입가엔 웃음이 흘렀지만 주름진 눈가엔 물기가 촉촉했다.
수업 10분 전, 교무실 행정직원이 사과와 복숭아를 양손에 들고 왔다. “어디서 났어?” “충용이네 집에서 드시라고 가져왔네요.” 대화는 무심했다. 오전 11시. 수업종이 울렸다. 운동장 저만치에서 아이들이 뛰어왔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란 건 잘 알고 있다.
“니네도 사과 먹었어? 복숭아는?” 노교사의 질문에 아이들은 차례로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떠나는 선생님에게 직접 전하는 편지다. 노교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갔다. 노란색 분필로 칠판 가득하게 글을 썼다. ‘마지막 수업.’
그는 38년 교직생활의 감동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이들로썬 상상하기 힘든 옛날 일들이 노교사의 기억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전라북도 임실이 고향이다. 이 곳에서 나고 자라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공부를 해서 모교(母校)의 선생님이 됐다.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아이들이 자라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는 아이들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종종 시(詩)도 썼다. 그리고 오늘 정든 학교를 떠난다.
노교사가 인생을 말하는 동안, 교실 밖에선 새가 울었고 꽃은 바람에 흔들렸다. 12명의 아이들은 눈망울을 굴리며 귀를 기울였다. “우리 대길이 아버지도, 민수 아버지도, 성민이 아버지도 내가 가르쳤다.”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들은 무엇이 좋은지 ‘까르르,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교실은 따스한 햇살과 찬란한 웃음으로 출렁였다.
“내가 니네를 생각하면서 동시집을 만들었단다. 그 책을 선물로 주고 갈란다.” 노교사는 아이들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했다. 동시집을 열고 당부의 말을 썼다. “주희야, 소희야. 할매 잘 모시고 잘 살아야 한다.” “성민아, 큰 강과 큰 산 같은 사람이 돼라.” 노교사는 각자에 필요한 글귀를 써놓은 뒤 아이들을 껴안았다. “내가 말여. 니들하고 있는 동안 너무나 행복했다. 고맙다.” 아이들은 그의 품에 포근하게 안겼다.
다시 수업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책을 안고 운동장으로 조르륵 내달렸다. 교실엔 노교사만 남았다. “3년 전부터 마지막 수업을 준비했는데. 참 막막하네요.” 그는 아이들이 남기고 간 편지를 만지작거리다 가방에 넣었다. “집에 가서 아내랑 둘이서 읽어 볼랍니다. 눈물이 많이 나겠네요.” 노교사의 뒷모습이 쓸쓸했다.
전북 임실 덕치초등학교 교사인 김용택(60)시인.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그는 2008년 8월 26일 마지막 수업을 했다. 교단을 떠난 것은 나흘 뒤인 30일이다.
▲ 김용택(60)시인은 섬진강 시인으로 불린다.
섬진강에서 태어나 자라고 배웠다. 그 곳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간다. 그리고 언젠가 섬진강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사람은 김용택처럼 살아야 한다. 그것이 순리다. 그는 1948년 임실에서 태어나 여지껏 고향을 지키고 있다. 임실을 떠난 것은 평생 단 두 번이다. 전쟁으로 피난을 갔을 때와 고교 졸업 후 방황할 때가 전부다.
그는 고향에서 어른이 됐고 교사라는 직업을 얻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자연과 아이들 옆에서 시를 배웠고 유명해졌다. 먼 훗날, 흙으로 돌아갈 곳도 고향이다.
“우리 학교 안에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어요. 내 지나간 날들을 살구나무와 같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살구나무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작은 나무였어요. 아이들과 살구를 따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서른 살이었고, 아이들이 꽃잎을 날리면 그 꽃잎을 따라다니다 웃음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니 마흔 살이 되었던 거죠. 아이들과 웃느라고 뛰어다니다 앞산을 보니 쉰 살이었어요. 이제 살구나무가 다 살고 꽃도 안 열리고 살구도 안 열리고…. 학교를 나가려고 돌아보니까 예순 살이 됐네요. 세월이 정말 금방이죠?”
그는 교정을 나오면서 “다음 주부터는 학교에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러번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학교를 쳐다봤다. 그만큼 덕치초등학교는 애틋한 곳이다.
“선생이 돼서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고 해서 선생이 됐으니까, 여기서 나를 잘 가꾸면서 한번 살아보는 것도 괜챦겠네 하는 소박한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교직 38년 가운데 27년을 이 학교에서만 산 거죠. 있어도 지루한 적이 없었고 떠나고 싶은 적도 없었고….”
한때는 전교생 700여명에서 이제 45명으로 줄어든 시골의 작은 학교. 김용택은 여기서 많은 제자를 만났다. 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는 뜻밖에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제자들한테는 교사로써 한 인간으로써 잘못한 게 너무 많죠. 지나치게 혼내거나 체벌을 했다던가. 힘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으로써 인격적인 대우가 아닌, 힘있는 자로써 대했다는 생각이 참 많아요. 요즘에는 뒤돌아보면서 곳곳에 미안한 곳이 너무 많고. 애들 찾아 다니며 그때 내가 잘못했다고 빌고 싶어요.”
마음이 뭉클했다. “그런 말도 해주고 싶네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라, 사람이 희망이다. 극심한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인간이 소외 받는 사회인데. 나는 그럴 수록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의 언어엔 묘한 리듬이 숨어 있다. 남도 사투리 특유의 억양이 그 리듬을 더욱 상쾌하게 했다. 하지만 종종 그 리듬은 잘 벼려진 칼로 변했다. 현 교육의 문제점을 질타할 때 그랬다. 그만큼 그의 비판은 통렬했다.
“적어도 초등학교에서는 점수 위주 보다 삶 위주의 교육을 열어야 한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나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다는 걸 가르쳐야 한다는 거죠. 지금은 나만 있는 거잖아요? 나만 일등하면 되니까.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교육적인 상황이 많아요. 그 속에서 창조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그런 교육이 중요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커졌다.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것이. 초등학교 1·2·3학년 아이들이 학원을 하루에 세개, 네개를 다닌다는 거예요. 여기서 음악 배우고 저기서 태권도 배우고 영어 배우고 뺑뺑 도는데. 그 아이들이 그 지식을 이해하고 감당할 능력이 있겠어요?”
후배 교사들에겐 이런 말을 남겼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랑입니다. 교사는 사랑을 줄 때와 회수할 때를 적절하게 조절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건 아이가 어렵고 곤경에 처했을 때 쏟아야죠. 아이들은 진심이구나 싶으면 다가 오거든요. 사랑의 회수도 중요하죠. 애들이 거짓말 한다거나 비겁하면 매섭게 사랑을 회수해야죠. 선생님이 이럴 때는 사랑을 회수하는구나, 이럴 땐 끊임없이 사랑을 주는구나. 아이들이 이걸 알아야죠. 그 과정을 통해 바른 길로 인도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고수(高手)의 말은 이해해도 실천하기 힘들다.
1982년 ‘섬진강 1’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타난 김용택. 그의 글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수많은 문학상도 받았다. 고수에게 글 잘 쓰는 방법을 묻자 “잘 살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의 말은 이랬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삶을 잘 산다는 건데. 살고 있는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돼요. 그럼, 그것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맺어지잖아요? 관계가 맺어질 때 생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고 글이예요. 결국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자세히 보고 아는 사람이 글을 잘 쓰는 사람이죠.”
김용택은 이런 말도 했다. 자연이 말하는 걸 받아적는 것, 그것이 글이다. “바람이 흔들리는 모습이라든가, 꽃이 봄부터 펴서 지금까지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연이 너무 많은 말을 해주기 때문에 받아 적기도 힘들어요. 봄이 되면 아침에 꽃이 피고 꽃잎이 날리지, 새들이 찾아와 울고 난리를 치지, 농부가 왔다 갔다 하지. 자연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해주는 거예요. 예전에는 감당을 못했어요.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어요. 이젠 자연과 화해를 했어요. 그렇게 심한 갈등을 겪고 나니까 산이 산으로 가버리는 거야, 꽃은 꽃으로 가버리는 거야, 물은 물로 가버리는 거야. 객관적으로 볼 수가 있는 거지. 이래서 나이를 든다는 건 아주 아름다운 거예요.”
자연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에서 나오는 언어를 말해라. 그것이 곧 좋은 글이고 좋은 시가 된다. 그런 까닭에 때묻은 어른보다 순수한 아이들이 시인에 가깝다고 김용택은 믿는다. 교단을 떠나는 그가 어린 제자의 좋은 시를 추천했다. 김용택은 그 글을 보고 많이 웃고 많이 배웠다고 했다. 덕치초등학교 3학년 문성민(9)군의 글이다. 제목은 ‘뭘 써요? 뭘 쓰라고요?’
▲ 김용택(60)시인은 가슴에서 나오는 언어를 말하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곧 좋은 글이기 때문이다. 교단을 떠나는 그가 어린 제자의 작품을 소개했다.
시써라
뭘써요?
시 쓰라고.
뭘 써요?
시 써서 내라고!
내.
제목을 뭘 써요?
니 맘대로 해야지.
뭘 쓰라고요?
니 맘대로 쓰라고.
뭘 쓰라고요?
1번만 더하면 죽는다.
뭘 쓰라고요?
이 녀석아!
장난하냐!
사족(蛇足)
김용택은 교단을 떠났지만 고향을 떠나진 않을 생각이다. 앞으로도 임실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마침 임실군청은 그의 집 인근에 ‘문학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김용택은 여전히 아이들과 놀며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와 두 번을 만났다. 좋은 사진을 얻고 싶다 핑계를 댔지만 실은 그가 보고 싶어 먼 길을 다시 찾아갔다. 수많은 대화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교과서에 실린 시 ‘그 여자네 집’과도 관련된 이야기다.
“초겨울에 들판을 걸어가는데 저 멀리 푸른 배추밭이 보였어요. 그 여자가 수건을 쓰고 허리를 굽혀 배추를 이더니 걸어오는 거야. 논으로 쭉 걸어오는데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 같아. 벌떡 놀랬죠. 그 하얀 수건을 쓰고 배추를 소쿠리에 담았는데 배추가 출렁거리는 거야, 여자의 치마는 하늘거리는 거야. 그 모습에 내가 반했던 거죠, 하하.”
“사랑은 기쁨과 아픔이 동시에 있는 거고, 행복함과 괴로움이 동시에 있는 거죠. 사랑이야 말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는 가장 아름다운 겸손이죠. 놀라워요, 사랑이라는 게. 인간에게 사랑이 없으면 빈 껍데기예요.”
2008.8.29 이학준 기자 arisu01@chosun.com
아내, 그리고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언젠가 아내가 학교에 왔다.
아내는 내가 맡은 2층 2학년 교실에 오더니, 창문 밖으로 펼쳐진 앞마을, 앞강,
그리고 앞산을 보고는 감탄을 했다.
참 좋은 곳이다. 당신은 참 좋겠다.
사계절이 나날이 변하는 아름다운 병풍 안에서 사니 얼마나 좋을까.
당신은 복 받은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내만 그러는 게 아니다.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 내 아내와 똑같은 말을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교실 창문들 중 제일 오른쪽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오른쪽을 보면,
작은 시냇물 하나 건너 작은 들이 있다.
그 작은 들이 시작되는 곳에 여자들 젖무덤 같은 산이 하나 평지에 돌출되어 있는데,
그 산은 들 끝에 조용하게 자리 잡은 마을을 절반쯤 가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산이 가릴 듯 말 듯한 까만 기와집 한 채가 있다.
그 집이 내 시에 등장하는 ‘그 여자네 집’이다.
‘그 여자네 집’이란 시는,
내 나이 스무 살 무렵 이웃 동네에 사는 처녀와 나의 사랑 이야기를 쓴 시다.
시 속에는 그 여자네 집과 그 부근의 풍경이 그려져 있고, 연애시절
그 여자와 나의 일화들이 담겨 있다.
아내가 학교 교실에 처음 와서 교실 밖 풍경에 반해 좋아할 때,
나는 ‘그 여자네 집’을 보며 “여보, 저기 ‘그 여자네 집’이 보이네.” 하며
‘그 여자 네 집’을 가리켰다.
‘그 여자’가 아닌 이 딴 여자는 한참 “어디? 어디?” 하다가는
“참내, 이놈의 유리창에다가 선팅을 해부러야 것구만!” 하며 나를 보고 웃었다.
이처럼 나는 우리 교실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꼭 ‘그 여자네 집’을 보여주곤 한다.
‘그 여자네 집’과 내 아내 사이에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학교에서만 ‘그 여자네 집’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 집을 가려면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없다.
어느 봄날, 나는 아내와 함께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 여자네 집’에는 살구꽃이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보며 “하따, 여보 ‘그 여자네 집’에 살구꽃이 겁나게 피어부럿그마잉~ 진짜 좋다!”
하며 아내를 바라보았더니, 아내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저 놈의 살구나무를 베어부러야지.”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그 여자네 집’에 있는 은행나무, 감나무로 아내를 놀렸다.
그럴 때마다 은행나무, 감나무는 아내 입으로 베어져야 했다.
어느 가을날 나는 아내 없이 아들과 함께 시골에서 전주로 가고 있었다.
우리 마을을 막 벗어났는데, 전화가 왔다. 민세가 전화를 받더니,
“엄마, 여기 ‘그 여자네’ 감나무 있는 데야.” 하며 곧 전화를 끊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빠, 엄마가 나 전주 오면 죽인데.”였다. “왜?” 하자,
“엄마가 우리 어디 오냐고 해서 내가 ‘그 여자네’ 감나무 있는 데라고 했거든.”
우린 크게 웃었다.
어느 날은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는데
‘그 여자네’ 어머니가 굽은 허리로 우리 앞을 지나가셨다.
내가 아내더러 “여보 ‘그 여자네’ 어머님이 지나가시네. 내려서 인사라도 허고 가야지.” 그랬더니
아내는 눈을 흘기고 내 어깨를 꼬집었다.
‘그 여자’ 어머니에 대해서는 ‘이 여자’도 어떻게 해코지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를 몇 번,
어느 날은 또 그 어머니가 지나가시길래 아내를 놀렸더니
“참내, 그런데 저 어머니는 ‘그 여자’를 왜 낳았데.”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아무래도 그 말이 옹색한지 혼자 머리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 둘은 늘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다녀야 할 것이고,
그럴 때마다 나는 또 ‘그 여자네 집’을 보며 아내를 놀릴 것이다.
‘그 여자네 집’에 눈이 오고, 살구꽃이 피고, 은행나무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한 말이다.
아내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네 집’ 살구나무도, 감나무도, 은행나무도 모두 지금까지 무사하다.
어느 날은 이 놈의 길을 저 뒷산 너머로 내야 한다고 까지 했지만 절대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글을 쓰다가 유리창 너머로 ‘그 여자네 집’을 바라본다.
학교 운동장 가 나뭇잎들이 무성해서 ‘그 여자네 집’이보이지 않는다.
아내는 안심될까.
<시인 김용택을 엿보다>
오늘 여행지로서의 섬진강 자랑은 물론이고, 선생님의 삶 전반에 흐르는 듯한 느림과 쉼표의 코드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우선 섬진강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는데요. 섬진강을 소재로 줄곧 시를 써왔고, 산문이든 동시든 섬진강이 항상 중심에 있는데, 강도 가뭄에는 마르듯이 시적 발상도 한 가지 소재는 고갈 되어질 수있다고도 보는데... 어떠신지요?
지금 이 학교는 제가 졸업한 학교고 평생을 섬진강과 이 고장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이 한 군데서 너무 오래 있어서 지루하지 않느냐 그러는데.. 예를 들면 지금처럼 비가오고 나무가 이파리가 필 때가 아닌데 피어있는, 그런 자연현상을 세심하게 바라보면 자연은 늘 새로운 것을 보여줍니다. 시도 마찬가지죠. 감나무잎을 보고 글을 쓸 수도 있고 살구꽃을 보고 글을 쓸 수도 있고, 또 살구잎이 질 때, 살구 나무가 죽을 때도 시든 산문이든 쓸 수가 있죠. 자연은 늘 시시 때때로 변화가 있고 감동이 있어서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합니다. 마치 스님들이 산속에서 세상과 오랫동안 벽을 쌓고 살면서도 그 속에서 삶의 진리나 진실, 삶의 방향을 찾는 것과 같은 이치죠.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자연현상을 무덤덤하게 보기도 하는데요. 자연속에서 그런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시인의 타고난 감성입니까?
자연은 마음을 열고 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뭇잎이 폈네, 꽃이 폈네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자연을 보면 그건 안본 거나 똑같죠. 같은 장소를 같은 나무를 같은 들판을 몇 년을 바라보면 무궁무진한 변화가 일어나요. 마음을 열고 아주 찬찬히 보는 것이 필요한 거죠.
도시사람들이 급하게 살아야 하는 환경이잖아요. 자연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그런 거 보면 안타까우시겠어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죠. 항상 긴장되어 있고.. 그냥 늘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차가 와서 받아버릴수도 있고.. 뭐 하튼 위험요소가 많잖아요. 그건 어찌 보면 생활이 아닌 찰나를 모면하려는 순간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도시 문화가 척박하죠. 또, 타락주의적이고, 찰나주의적이고. 그래서, 도시적인 삶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말하는 것도 그렇고, 몸짓도 그렇고, 또 사회전반에 나타나는 문화 자체, 언론이나 모든 게 다 제정신이 아니죠. (웃음)
미국이 이라크 침략했을 때, 어느 신문에선가 선생님의 칼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운동장에 미사일이 떨어진다면... 뭐 그런 내용으로 기억하는데 이 창문을 보면서 쓴 것이겠네요. 그 전쟁을 지켜보면서도 남다른 느낌을 가졌을 텐데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인류의 존재에 대한 가치라든가 희망이라든가 하는 것이 허탈하게 무너지더군요. 초강대국의 미국의 행위가 과거에는 명분이라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단지 힘이 강하다는 이유로 최신무기를 가지고 한 나라를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가차없이 죽인다는 것은 정말 야만이거든요. 내가 생각할 때 우리 인류 문명이 굉장히 발달되었다고 그러는데.. 옛날 로마 때나 징기스칸 때나.. 그때와 비교해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극악스럽게 야만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발전했다면 칼에서 미사일이겠고..하여간 인류문명의 발전은 다 뻥이죠. 우리 인간이 진보해왔다 그러는데, 다 뻥이예요. 전쟁을 지켜보며 무기력하고 허탈했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뭔가.. 그저 허탈했죠.
선생님은 지금 말씀하신 것들이 어느 정도는 가능한 환경에서, 그렇게 성찰을 하며 사시는 듯 해서 부럽습니다. 그런 느림의 박자를 가지고 사시는 선생님에게 제가 삶이란 뭔가를 질문했을 때 어떤 답이 나올까요?
정의 내리기 어렵죠? (웃음) 다만 삶은 짧고 별볼일 없고,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발악을 하고 하루를 살고 눈앞에 있는 이익을 쫓아다니면서 혼신을 다해서 살고 있지만, 들여다 보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허무입니까? 삶을 허무라고 진단하면 진짜 허무해집니다.
내가 생각한 삶이란 것은 가치 죠. 가치. 짧은 삶에 있어서 자신의 삶의 방향과 가치를 정확히 알고 살아가는 거.. 그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자연을 통해 삶을 배울 수 있다면 관조의 능력이 아닐까 한다. 삶을 허무하다고 진단할 수 있는 것은 삶에 끌려갈 때가 아니라, 삶을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그의 철학은 그의 시 <섬진강 12>에서도 얼핏 엿볼 수 있다.
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 ...(중략)... /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 온갖 가지 가지 구호와 / 토착화 되지 않을 / 이땅의 민주주의도, / 사람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 한낱 검불이구나. /... (하략) - <섬진강 12>
도시에서 사시면 선생님같은 경우엔 더 유명해지실 것 같고, 활동도 많이 하실 것 같고 그런 유혹은 없으셨나요?
그런 건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도시가면 글 못씁니다. 내 몸에 익숙한 이 산천을 벗어나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여기서 그간 몸에 익어왔던 산천을 벗어나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어요.
개인적으로 김용택시인을 만나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두 개 꼽으라고 한다면, 하나는 섬진강 그리고 하나는 시인의 로맨스였다. 시인의 작품 중 <그 여자네 집>이나 <참 좋은 당신>과 같은 시를 읽게 되면 그 맑고 고운 느낌으로 인해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모처럼, 정말 모처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천담분교의 교사시절이었던 90 년대 초반의 2 년간, 진메마을에서 학교까지의 10 리 강길을 신선처럼 걸어서 출퇴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오가는 길에 산딸기를 따먹고, 풀들과 대화하며 꽃을 벗삼아 나무들을 스승삼아 그대로의 자연이 되었노라고 그의 책에서 술회한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길가에서 똥을 싸며 넓디넓은 아름다운 변소를 찬양하기도 했고, 돌자갈 굴러가는 소리에 지구가 깨어나 돌고 있다는 미세한 감정을 학습하기도 했던 그 때 그 2 년.
그러나 퇴근 무렵 아내가 딸그락 딸그락 자갈길을 걸어 마중을 나오고, 비가 올 때면 바람과 함께 마중을 나온 아내가 꼭 안아달라는 말을 했다는 대목을 읽었을 때, 그 때 그 시절을 꼭 직접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희가 아까 천담분교를 갔다왔는데, 지금은 섬진강 수련원으로 변해있더군요.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집까지 십리길을 걸어다니셨던 거죠? 거기에 사모님이 마중 나오시고.. 그거 진짜 영화의 한 장면 아닙니까?
그때는 정말 영화같이 살았습니다. 뭐.. 그림이였죠. 그 길이 지금 허물어져 있는데, 옛날엔 길이 좁았습니다. 좁아서 풀이 꽉 차 있었고, 차도 안다니고 사람이나 다닐 수 있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걸어다니면서 자연을 봤죠. 아주 좋았습니다.
퇴근길 그 숲길을 마중 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근사해 죽겠습니다. 자연이라는 모티브가 <섬진강>이라는 연작시를 쓰게 하는 기제였다면, 그런 부부간의 사랑이나 연애관이 다수의 연시를 쓸 수 있었던 모티브였겠는데요. 금슬 좋은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게되신 거예여?
(박카스를 꺼내주며) 하하하.
사모님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그렇게 기분이 좋아지시나 보네요. 막 퍼주시게..
(갑자기 딴청) 우리 아이들 그림 잘 그리죠? 이게 작년에 그린 건데 아주 잘 그렸잖아요. 비가 오는 날을 그린 것좀 봐요. 이 색깔. 저거 꽃 화병은 작년에 우리반 아이가 그린거예요. 그런데, 우리반 아이가 다른 반만 가면 그림을 못 그립니다. 허어~ 그게 참 이상합니다.
네 잘 그리고요..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냐고 하니까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하. 집요하시네. 제가 결혼을 아주 늦게 했어요. 가난하게 살다보니까.. 그런데 내가 시집을 내기 전에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그 이듬해 탈상을 하는데, 그 때 우리 안사람이 대학교 4 학년때였어요.
그러니까 두 분이 몇 살 때 결혼하신 겁니까?
전 38 살, 안 사람은 24 살.
(박카스를 바라보며) 지킬 건 지켜야지.
하하. 나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14 살 차이 납니다. 그 때 내 세째 동생이 친구랑 같이 문상을 왔는데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안사람이 된 거죠. 그 때, 나는 나이가 많고, 안사람은 나이가 어렸으니까.. 그 사람을 결혼을 염두에 두고 본 적은 전혀 없었는데, 안사람이 갑자기 졸업을 하고 나서.. 그 때가 11 월달인가 되었을 텐데.. 어느 날 밤에 저희 집에 왓어요. 우리 집에 오려면 차도 안다니자나요. 그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온 거에요. 그래서 내가 아주 놀래서 혼내줬죠. 이쁜 처자가 이렇게 밤 늦게 돌아다니냐고...(흐흐) 그랬더니 안사람이 어머님하고 놀다가 갑자기 저한테 와서.. 선생님.. 선생님하고 살면 안되요. 이러는 거예여. (일동 폭소) 아주 황당하고 놀랬죠 전...
그러니까 문상을 왔을 때 처음 보고, 갑자기 나타나신 건데.. 그 사이에 서로 만나거나 그런 적도 없었단 말이죠?
없었죠. 난 그 사람에 대해 몰랐죠. 문상온 후에 그 담주엔가 전주에 갔더니 동생집에 와 있더라구요. 난 그 여자가 그 여잔지 몰랐찌.. 관심도 없었고.. 그러니 갑자기 찾아와서 같이 살자고 그러는데 내가 혼을 내서 보낸 거죠. 근데 계속 쫒아다니면서 그러니까...
화투판에서만 땡잡는 것은 아닌데.. 왜 혼을 내셨을까요? 솔직히 말씀하시죠. 속으로는 째지셨죠?
하하. 하여간 그 때는 얼토당토 안했으니까.. 그리고 안사람은 당시 무주 읍내에서 이쁜 여자였고 대학을 다녔고, 아버지가 공무원이었고.. 나같이 가난한 시골 사람한테 시집을 간다고 하면.. 그 집에서 가만히 있겠어요? 실제로 결혼한다고 하니까 난리가 났죠. 뭐 근데 여튼 둘이 같이 살게 됐죠.
아니 근데, 사모님은 왜 문상을 와서 선생님을 처음 보고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평소 선생님의 시를 좋아한 건가요?
시는 전혀 몰랐습니다. 뭐 어렴풋이 셋째 동생 친구였으니까 형이 시를 쓴다는 소릴 들었을 수도 있지만, 시가 뭔지도 잘 모르고...
나중에 결혼한 후에 사모님이 고백하셨을 텐데. 처음 본 순간 뿅갔었노라고 자백하시던가요?
아, 그랬답니다. 처음 보는 순간에 '아 나는 저 남자랑 살아야겠다'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게 뭐.. 설명이 잘 안되죠.
연애기간은요?
한 2 달인가 가졌었는데, 억수로 반대하니까, 보따리를 싸가지고 와서 살아버렸죠. 애기 낳고 결혼식 했어요. (다시 일동 폭소) 그런데 안사람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땐 불때서 밥을 하잖아요. 그 힘든 일을 다 견뎌주고 어머님한테도 잘 하고, 퇴근하다보면 느티나무 앞에서 그림같이 영화같이 서 있습니다. 그럼 둘이 같이 집에 들어가고.. 나중에 내가 안사람한테 물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잘생기길 했냐? 키가 크냐? 돈이 많냐? 장래가 촉망되길 하냐? 아무 것도 없잖아요. 초등학교 선생이라는 게... 거기다가 나이도 많고.. 근데 왜 나와 살자고 하느냐... 했더니...
했더니?
그냥.. 그냥.. 그냥 자기도 몰랐답니다. 내가 아니면 안될 것 같고.. 그냥.. 좋아서 그랬다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쯤되면 선생님은 경험에 의해서라도 소위 '운명적인 사랑'을 믿으시겠네요?
그게 참 희한한 일입디다.
어떻게보면 사모님은 아버님이 주신 선물일 수도 있겠고요.
우리 어머님은 그럽니다. 아버님이 내가 나이먹도록 혼자 사니까 여자를 데려다 줬나보다 그러십니다.
서른 여덟 노총각이 되기 전까지 사귀는 여자는 없으셨나요?
독신주의자는 아니였으니까, 주위에 여자들이 있긴 했습니다.
여자.. 들이요?
몇 여자가 있긴 했는데, 자신있게 못 나섰던 거죠. 장가는 가고 싶은데 차마 여러 가지 조건이 안되니까 못 가고 있었는데. 우리 안사람이 들어와 사니까 그 여자들이 놀래서 자빠졌죠. 찾아와서 막 울고.. 자기들한테 한 마디도 안하고 그랬다고...
선생님이 연애의 재능을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진 않으세요?
연애의 재능이라기보다도.. 머랄까.. 나는 사랑을 숨기질 않아요. 내가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서 숨기질 않았죠.
오호.. 마음에서 느끼는 부분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표현 하신다?
연애감정이란 게 있잖아요. 그런 게 함부로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필이 와야하자나요. 그럼 그렇게 쉽지 않은 필을 받았다면, 그래서 좋아함을 느꼈다면, 좋아한다고 그냥 솔직하게 말 하는 거죠. 뭐...
오늘은 아무 생각 없고 / 당신만 그냥 많이 보고 싶습니다. <푸른하늘>
당신을 만나 안고 안기는 것이 / 꽃이고 향기일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지금 그리로 가고 싶어요. <거기 가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참 좋은 당신>이라는 시를 좋아합니다만, 그 시는 사모님을 대상으로 쓰신 건가요?
아~ 그건 우리 안사람입니다.
정치적인 발언 아니신가요?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안사람입니다. <거침없는 사랑>속에는 그동안 내가 연애해왔던 시가 다 들어있고, 몇 편은 우리 안사람 얘깁니다. 다른 많은 연애시들은 그 동안 겪었던 연애 감정을 노래한 것들이 많습니다.
<참 좋은 당신>
어느 봄날 / 당신의 사랑으로 / 응달지던 내 뒤란에 /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 나는 보았습니다 /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 만들 수 있는 / 밝고 환한 빛으로 / 내 앞에 서서 / 들꽃처럼 깨끗하게 / 웃었지요 / 아, / 생각만 해도 / 참 / 좋은 / 당신
<그대, 거침없는 사랑>
아무도 막지 못할 / 새벽처럼 / 거침없이 달려오는 / 그대 앞에서 나는 꼼짝 못하는 / 한떨기 들꽃으로 피어납니다 / 몰라요 몰라 / 나는 몰라요 / 캄캄하게 / 꽃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세상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는 / 그보다 더 따뜻할 수 있는 / 그보다 더 빛나는 말이 있을 리 없겠지요 / 당신......
연애도 아니고 현재 결혼을 해서 살고 계신 사모님을 대상으로 시를 쓴다는 건 아직까지 연애감정이 남아있다는 건데, 그게 참 쉽지 않은 일인테요. 현실적으로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는 말이 상당히 유효하자나요. 사랑이 원수가 되는 징검다리가 결혼이라는 말도 있고...
결혼하셨어요?
예.. 불행하게도.. (일동 웃음)
그렇죠. 남편과 아내라는 게... 참 심란합니다. 이게...
하하하. 심란 그거 좋은 표현이네요.
아~ 심란합니다. 왜냐면 이 사회 구조 자체가 개방이 되도 너무 되다 보니 심란해져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나라 남자들이 못되먹은 게 있습니다. 딴나라 남자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남자들은 아무리 개방적이고 아무리 좋은 남자라고 해도 자기 아내보기를 참 개떡으로 보죠. 첨에야 좋아서 지랄을 다 하지만, 한 1 년 살면은 아내를 개떡으로 봅니다.
딴데 눈 돌리구요. (아 무진장 찔금거린다)
아.. 예.. 눈 돌리구요. 존경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 그러니까, 아내를 종 부려먹듯이 부려먹고.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흥분모드) 참, 우리나라 남자들처럼 아주 쪼잔하고, 째째한 놈들이 없다는 생각을 해요. 좀 똥침을 맞아야 되어요. (웃음)
제가 시를 쓰고 글을 쓰지만, 시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을 안했습니다. 시는 내 삶을 도와주는 겁니다. 잘 살 수 있도록,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죠. 문학이라는 게 문학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그냥 나를 도와주는 겁니다. 또 그게 다른 사람을 돕기도 하고.. 뭐 어떤 식으로든 여러 가지 영향을 주겠죠. 예술은 감동이니까... 문학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하고 오히려 하루하루 사는 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나간 시간보다 이 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실제로 부인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나는 안사람에게 굉장히 잘 하는 편입니다. 안사람이 내게 불만이 이 만큼도 없습니다. 인간으로 남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한서, 또 교육자로서 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불만이 전혀없고, 요구사항도 전혀 없습니다. 난 우리 안사람한테 단 한 번도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양말 어딨어.. 이런 말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안사람이 양말을 챙겨준다던가 손수건을 챙겨준다던가 그런 거 없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여보 밥 좀 더줘'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시키는 것이 안됩니다.
선생님이 직접 다 하십니까?
내가 합니다. 물론 처음에야 안사람이 떠다주지만, 안사람이 식사 준비를 하면, 얼른 물 떠놓고 숟가락 놓고 반찬 갖다 놓고 그러죠. 국을 더 먹고싶다던가 물을 더 먹고 싶다던가 그러면 한 번도 '여보 물 좀 줘'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사람을 시킨다는 게 참 이상합니다. 여보 옷 있어? 이럼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디 있는지 아니까 제가 가져다 입지 시키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한 번도 불편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살기 때문에 아이들도 어머닐 절대로 안 시킵니다. 아이들도 다 내가 받아서 내가 키웠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그게 어찌 보면 농촌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도시사람들 참 많이 바쁘잖아요.(쩔쩔 매며)
그럴 수 있죠. 일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정말 고생하잖아요. 그러니까 집에 오면 편안하게 쉬고 싶어하고 아내들도 편안하게 해줄려고 노력하고 하죠. 기자님 말씀대로 내가 하는 일이 스트레스 받고 힘든 직업이 아니니까 이런 생활이 가능할 수도 있죠. 그러나 요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저는 안사람을 굉장히 존경합니다. 그리고 안사람 판단이 다 옳아요. 아니 대개의 경우 남자들보다 여자들의 판단이 다 옳아요. 그래서 모든 걸 다 안사람에게 물어봅니다. 거의 모든 걸 상의 하죠. 내가 술도 안 좋아하기때문에 술친구도 없고, 술도 안 먹으러 나가고.. 10시 되면 술자리에서 집으로 들어옵니다. 술 취하면 다 그 소리가 그 소리나 하고 자빠져 있으니까.. (웃음) 그러다 보니 가장 이야기 많이 하는 사람이 안사람이 된 것입니다. 가장 시간도 많이 갖고요. 영화도 같이 보러 다니고. 어디를 가도 안사람이 운전을 하고 같이 다니고 그럽니다.
남에게 뭔가를 심부름 시키지 않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인 것입니까? 아니면 부인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런 겁니까?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어머님이 인간에 대한 성실한 모습을 늘 보여줬죠. 우리 어머니가 무학이시지만, 농민들의 삶이란 게 무궁무진한 겁니다. 대단하고 상상을 못할 정도로 삶이 풍성하죠. 한 마디로 인간성이 풍성한 것입니다. 우리 어머님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사람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거죠. 또 하나는 '남의 일이 아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하셨어요. 보세요. 이게 지금 해석해보면 사회적인 발언이잖아요. 정치일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도 생명을 굉장히 소중히 생각하셨어요. 나무 함부로 베는 것, 땅에다가 뜨거운 물 버리는 것을 못하게 하셨죠. 어머니는 생명이란 말을 모르실 테고 목숨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신 겁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고. 또, 어머니는 폭 넓게 사람을 수용합니다. 저는 우리어머니 발 끝에도 못 따라가요. 내가 성질도 개떡같이 생기고 그래가지고... 못 따라갑니다. 그렇게 삶을 풍요롭고 풍성하게 살았죠. 인간이란 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우리 어머님한테 배웠습니다.
사람을 가장 우선으로 두는 선생님의 마인드가 일상에서는 어떤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나나요?
학교에서도 애들한테 심부름 잘 안시킵니다. 내가 후딱 가져 오고 그러죠. 사람을 만났을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수도 없이, 거의 날마다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런데, 처음엔 짜증이 나고 그랬죠.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어머님은 이렇게 하셨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람에게 늘 성실하자는 것이 제 마음에로 흐르는 거죠.
<사랑>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 지난 몇 개월은 / 어디다 마음 둘데 없어 /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 답답했습니다. / 하지만 지금은 /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 그래도 마음 속의 아픔은 /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 어디선가 또 / 새 봄이 돋겠지요. / 이제 생각해보면 / 당신도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들 중의 /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 지난 몇 개월 동안 /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 세상이 더 넓어져 /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보이고 / 소중하게 다가오며 / 내가 많이도 / 세상을 살아낸 /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 고맙게 배웠습니다. /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의 어깨에 /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 한 봄입니다. / 행복하시길 빕니다. / 안녕.
....<중략>
개인적으로 나의 영화 베스트 5 를 뽑으라고 한다면..?
여러가지 장르가 있는데.. 한국영화를 아주 좋아합니다. 한국영화는 거의 다 봅니다. 우리 감독들이 영화를 엄청 잘 만듭니다. 나는 외국영화를 끊임없이 봐온 사람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봐왔는데, 우리 나라 감독보면서 대단한.. 참으로 위대해질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홍상수 영화를 아주 좋아하고..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는 대단한 영화였죠. 송강호를 참 좋아하고, 어제 <살인의 추억>이란 영화를 봤는데.. 대단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영화를 잘 만드는가.. 놀라울 정도로 영화를 잘 만들어냅니다. 이창동감독 영화하고 홍상수감독 영화하고 특히 좋아하는 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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