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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조상현
SUBJECT   사랑했던 기억… 사랑하지 못한 후회 - 이보영
사랑했던 기억… 사랑하지 못한 후회

[조선일보]

"먼저 간 사람들.. 그래서 저 위에 있는 사람들에겐 딱 두가지만 남는데. 사랑했던 기억하구 더 사랑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드라마 '로즈마리' 중(中)에서

살아오면서 아버지에 대해서 찌릿할 정도로 애정을 느꼈던 순간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는 옆에서 아기가 죽는다고 울어도 눈하나 ‘꿈쩍’ 않고 계속책만 읽으셨다고 한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언제나 아버지의 손에 들려있던 책과 맞물려있다. 아버지는 우리들을 데리고 놀러다니신 적도 없고, 살갑게 과자봉지나 과일을 사들고 집에 오신 적도 없다. 퇴근 길, 아버지 손에는 아버지 키의 반은 됨직한 한 두름의 굴비가 아닌 헌책이 들려 있었다. 안그래도 단신이신 아버지가 이 때는 더 작아보였다. 우리 아버지는 활짝 웃으셨던 적도 별로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실 때는 휘파람을 부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휘파람소리는 내 유년의 일상이었다. 나도 휘파람을 불고 싶어 여러번 시도를 햇지만 그저 쇳소리만 쉭쉭 났다.

어느날부터인가 나는 그 휘파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때가 커다랗게만 보였던 아버지의 구두가 문득 작아져 보이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하지 않을까..싶다. 아버지는 20년 이상 다니던 직장에서 뜻하지 않게 실직당했고 지병인 당뇨병도 그 전후로 얻으셨다. 오랫동안 세상은 아버지에게 선량하지 못했다. 3 년 전 아버지는 지병인 당뇨병 합병증으로 쓰러지셨고 몸 한쪽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때 나는 생전 처음, 아버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보영아 따랑한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회복이 어렵다..라는 말을 듣고도 나름대로 의연함을 지켰던 나였건만 아버지의 이 낯선 발음에는 그대로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성우 뺨치듯 젊고 낭랑했던 목소리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한때 아버지가 너무 차갑고 이성적으로만 보여서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는걸까..하고 의문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따랑한다'는 한마디는 어지럽게 얽혀있던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곡선을 직선으로 확 풀어버렸다. 파도치는 바다같은 사랑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부정해왔던 조용한 아버지의 강(江)이 사실은 얼마나 깊게 흐르고 또 흘렀던가가 득도(得道)하듯 그 한 순간 깨달아졌다.

작년 여름, 아버지는 끝내 병을 이기시지 못하고 먼길을 떠나셨다. 누가 '세월이 약'이라고 했나.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오히려 아버지 생각이 더 많이 나는데....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싶고, 커다랗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드리고 싶고,아버지가 그 반질해진 구두를 신고 '똑똑' 집으로 돌아오시는 소리도 듣고 싶다. 또, 해질 무렵 성정여고 운동장에 가서 아빠와 넓이뛰기와 철봉도 하고 싶고, 주말이면 아버지랑 헌책방에 가서 보고 싶은 만화책도 사고 싶다.

신기루처럼 이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진 지금, 아직까지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 '부재감'은 예고없이 가끔씩 내 중심을 무너뜨린다. 한번은 진짜로 내가 서있던 땅 한쪽이 휘청하고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 뭔가를 꼭 붙잡고 서있어야만 했던 적도 있다.
사랑했던 기억과 더 사랑하지 못했던 후회는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기도 하다.

(이보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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