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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조상현
SUBJECT   위대한 예술가는 모두 외톨이였다
위대한 예술가는 모두 외톨이였다

[뉴스메이커 2007-05-03 11:57]    


문화 속에 나타난 외톨이… 사색과 성찰 속 놀라운 창조의 순간 기다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 외톨이라는 유령이 자주 출몰한다. 그 유령은 저 바다 건너 한 대학에서 무차별 총격으로 서른두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동영상과 선언문에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증오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들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싶어 했다. 너희들 때문에 내 머리에는 암이, 내 가슴에는 공포가 생겨났다. 너희들은 내 영혼을 강간했다.” 그가 왜 총질을 해댔는지 밝혀진 게 없지만, 사춘기와 그 뒤로도 외톨이로 살아 왔다는 건 분명하다. 그는 콜렉티브 소울(Collective Soul)의 ‘샤인(Shine)’이라는 곡을 즐겨 들었다고 한다. “말하는 방법을 가르쳐줘/나누는 방법을 가르쳐줘/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줘/거기에 사랑이 있다고 말해줘/거기에 사랑이 있다고…” 사랑을 갈구하나 사랑을 받지 못 하고, 천국을 꿈꾸지만 거기에 이르는 법을 모른 채 헤매는 외톨이의 심리를 대변하는 노래다.

‘이방인’의 뫼르소 ‘구토’의 로캉탱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 ‘성’ ‘소송’에 나오는 K,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로캉탱,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나 패트릭 쥐스킨트의 주인공 들에서 외톨이라는 유령을 만난다. 그들은 사회적 관습에서 튕겨져 나오고, 타자들과의 교섭에서 심리적 장애를 보인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외톨이다. 뫼르소는 엄마의 장례식에 가서 울지 않는다. 제 엄마 장례식에 가서 울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울지 않은 뫼르소를 동정심도 없는 인간으로 여기고 분노한다. 아랍인에게 우발적으로 총을 쏜 뒤 그 동기를 묻는 판사의 물음에 뫼르소는 말을 더듬으며, 또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태양 때문에 그랬다”고 대답한다. 뫼르소는 살인에 대한 어떤 동기도 없고 타인들이 강요하는 죄책감도 없다. 뫼르소는 자기를 구제하기 위해 거짓말하지도 않는다. 사람들 생각에 뫼르소는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 하는 괴물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보통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하기 때문에, 즉 사회의 오래된 관습에 동화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외톨이, 즉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구토’는 1932년 1월 말부터 약 1개월 동안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연금으로 살아가는 30대의 역사학자 앙트완 로캉탱은 매일 느끼는 구토감의 실체에 대해서 궁구하며 메마른 나날의 삶을 일기로 적어간다. 로캉탱의 일이란 로르봉 후작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하거나, 카페에서 ‘언제나 가까운 날에’란 음악을 듣는 것이다. 철저하게 혼자만의 고립된 생활이다. 사실 로캉탱은 빨간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걸 빼고는 평범한 인물이다. 어느 날 로캉탱은 친구와 악수하려다가 친구가 뚱뚱한 벌레처럼 느껴져 몸서리를 친다. 문의 손잡이를 잡다가 손잡이가 인격을 가진 그 무엇으로 다가오자 공포감을 느낀다. 그는 외톨이가 되어 “무기력한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해파리의 수준으로 (중략) 멋대로 고동치고 자라나는 무미건조한 육체”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이 저열한 혼란을 증오한다. (중략) 나는 이러한 구역질나고 부조리한 존재에 대한 분노로 숨이 막힌다.” 그의 외침은 상처받은 외톨이의 분노다. 조승희의 선언문에 드러난 분노와 닮아 있지 않은가? ‘구토’의 세계는 사회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해서 저 혼자만의 실존을 꾸리는 외톨이의 매트릭스다.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아침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칙한 갑충으로 변신해 있는 끔찍한 현실과 맞닥뜨린다. 가족의 충실한 부양자이던 그레고르가 노동 능력을 상실하자 가족은 그를 수치스런 존재로 여기며 증오하고 학대한다. 가족에게서 무참하게 버림을 받은 그레고르가 죽자 가족들은 룰루랄라 하며 소풍을 떠난다. 그는 가족 속에서도 가엾은 외톨이였던 것이다.

패트릭 쥐스킨트의 ‘비둘기’에 나오는 조나단 노엘도 외톨이다. 고아이던 조나단은 군입대, 결혼과 이별을 겪은 뒤 은행 경비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전 재산이라고 해야 방 한 칸이 고작이지만, 조나단에게 그 방은 사회와 타자의 간섭이 배제된 자유와 행복의 공간이다. 조나단은 타인과의 교섭이 완벽하게 차단되는 그 좁은 방안에서만 온전한 현존을 꾸릴 수 있는 외톨이다. 그러나 외톨이들은 대단히 취약하다. 그 하찮은 비둘기의 간섭조차 견디지 못하고 이 외톨이는 간단하게 무너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중인물들도 가족, 사회, 국가 공동체에 소속되는 걸 한사코 마다하고 외톨이로 남는다. 가장이 죽고 이윽고 가족 해체가 이루어진다. 가족에서 튕겨나와 외톨이가 된 그들은 존재의 결핍감과 공허와 싸우며 자신의 살아간다. ‘상실의 시대’에서 요양원에 유폐된 나오코나 레이코가 그렇고, 또한 미도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가족이 해체되어 혼자 남은 사람들이다. 하루키의 외톨이들은 사회적 성공의 욕구도 없으며, 따라서 뚜렷한 이유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가사 노동을 하는 따위의 소외된 삶을 살아간다.  

사랑을 갈구하나 사랑받지 못해

현대소설이 다루는 인물들은 거의 모두 외톨이다. 이들을 비평용어로는 ‘문제적 개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사회의 내부에서 추방당한 방외인이자 이방인이다. 요즘 말을 빌리자면 ‘왕따’다. ‘왕따’는 사회 전체가 공모하여 그를 따돌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회 전체를 ‘왕따’시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회 바깥으로 걸어나가버린 이 개별자들은 타자들과 담을 쌓으며 저 혼자만의 성 안에서 홀로 침식을 하고 홀로 놀고 홀로 사유한다.

외톨이들은 공감과 연민, 사랑과 감정 이입의 대상으로서의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자신의 삶에 타자가 틈입할 수 있는 여지를 봉쇄해버린다. 이들은 타자와의 소통이 끊긴 지점에 제 삶을 세운다. 삶이 타자와의 끊임없는 교섭과 관계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외톨이들은 삶을 멈춘 사람들이다. “시간의 가능 조건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있다.”(레비나스)는 철학적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이들은 “시간의 가능 조건 자체”를 소멸시켜버리기 때문에 외톨이에게 희망이라든가, 미래의 현존 따위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외톨이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타자성을 상실하고 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이다. 그들은 내면이 얼음처럼 차고 단단하게 얼어붙고, 스스로를 차고 메마른 고독에 유폐한다. 이들이 세상에 맞서는 방식은 무관심과 냉소, 때로는 끔찍한 분노다. 그들에게 삶과 세상은 무의미로 가득 찬 공허 그 자체다. 외톨이들은 대개는 심오함이라고는 모르는 존재, 불만으로 자기 내면을 채우고 있는 괴물, 은둔하는 기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악마, 침묵을 지키는 잠재적 살인자로 오해받는다. 한편으로 그들은 숭고한 존재들이다. 외톨이는 조용히 사색하는 인간, 자기 성찰에 열중하는 자, 놀라운 창조의 순간을 기다리는 예술가의 모습이다. 위대한 저술과 예술작품을 낳은 이들은 한결같이 외톨이였다.

우리는 누구나 제 속에 외톨이를 감추고 산다. 가끔씩 당신 속에서 낯선 누군가 외롭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가? 이 외톨이는 실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유령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회적 교화에 심리적 저항을 하는 이들은 괴물이 아니다. 이 유령은 사랑과 관심을 베풀며 자라는 걸 도와야 하는 바로 우리 자신의 내적 인간이다.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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