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길농원
 
 
 

 전체 478건, 1 / 24 pages
NAME   조상현
SUBJECT   자화상(自畵像)
자화상(自畵像)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이 작품은 작자(作者)가 23세(歲) 되던 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이다.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작자 소개

참고 자료의  서정주의 삶과 문학 참조

요점 정리



구성 : '기·서·결'의 구성
제재 : 유소년기의 경험
주제 : 회고와 성찰에 따른 삶의 의지
성격 : 상징적
어조 : 자조적

  어휘와 구절


애비는 종이었다. : 시적 자아의 신분 내력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다. 이때 '종'이라는 시어는 이중적인 내포를 갖는다. 즉 '천민'이라는 의미와 '노예로 전락한 식민지 백성'이 라는 의미기 그것이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 궁핍한 집안의 상황 묘사
달을 두고 : 한 달 동안 계속하여. 여자가 아이를 가짐


·갑오년이라든가∼닮았다 한다. : 여기서 갑오년은 동학 농민 전쟁이 발발한 1894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가 동학 농민 전쟁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구절은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 털과 그 커다란 눈'을 닮았다는 진술과 이어지면서 시적 자아가 외할아버지로부터 외모만이 아니라 반항적 기질이나 떠돌이 기질까지 이어받았음을 암시한다.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 팔할(八割)은 젊음의 방황과 시련이 키운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 당당하고 단호한 어조. 궁핍과 상실의 공간에서 벗어나 유랑의 세계로 뛰어든 것은 죄인이 되건 바보가 되건 자기의 책임이므로 후회는 없는 것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① 부끄러운 세상  ② 자신의 미천한 신분 내력 때문에 세상에 대해 부끄럽다.' 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시 전체의 문맥으로 미루어 볼 때 두 번째 의미가 좀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마 위에 얹힌∼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 '피'는 혈연(운명적으로 부여받은 신분의 흔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 편의 시를 창조해 내기 위한 혼신의(피나는) 노력을 의미하기도 하고 아울러 동물적인 본성이나 충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이 구절의 의미를 명확하게 확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의 다층성이야말로 이 시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 주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혓바닥을 늘어뜨린 / 병든 수캐: 절망과 쇠락의 표정을 나타낸다. 이 시의 화자가 그린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시어 → 현실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혓바닥을 늘어뜨린 병든 수캐'에 비유
  

이해와 감상

「자화상」에서 시인이 회고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당시까지 겪어 온 20여 년의 생애일 것이다. 그 세세한 내용이 과연 실제의 사실과 그대로 부합하느냐의 여부는 이 자리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사항은 이 작품에 나타난 한 인물의 생애가 지닌 근원적 고통과 방랑의 모습,그리고 이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결의이다.
제1연은 주인공 `나'가 기억하는 아주 오래 전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보여 준다. 그것은 불행한 역사의 그림자 속에 있다. 그의 집안은 모순된 사회 제도와 가난에 시달렸다. 할아버지는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나던 갑오년에 집을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바다에 간 것이 아니라 그 농민 전쟁에 가담하였다가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종이었기에 주인을 위한 일에 매이어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못하고는 했다. 이 쓸쓸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는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암시된다. 바람에라도 쓰러질 듯 가늘고 연약한 모습 ― 이것이 위의 구절에서 암시되는 의미이다. 그런 가운데 아이를 가진 어머니는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고 하나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두운 밤 흙벽에 일렁거리는 호롱불 아래 가난에 찌든 어린 소년이 때가 낀 까만 손톱을 하고 이 어두운 풍경의 일부분이 되어 앉아 있다.
여기서 갑자기 시상의 흐름이 바뀌어 그의 지난 생애가 몇 마디 말로 요약된다. 스물 세 해 그의 생애를 지배한 것은 대부분이 바람, 즉 끊임없는 방랑, 세상 속에서의 시달림, 흙먼지와 추위 같은 것들이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그를 비웃기도 하고, 그의 고통을 어떤 죄의 값이라 여기기도 하였으며, 그를 천치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감연히 말한다 ―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개인적인 괴로움과 역사의 시련이 겹친 삶을 돌아보면서 그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나 아픔을 뉘우침 없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삶의 시련과 고통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욱 굳세게 일어나도록 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그 힘은 찬란히 트여 오는 아침에 그의 이마에 얹힌 시의 이슬로 나타난다.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는 시의 이슬이란 곧 괴로운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의 열매이다.
마지막 대목에서 `병든 수캐마냥 흔덕거리며 나는 왔다.'고 그가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쓰디쓴 회고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릴 수 없는 생명적 욕구에의 강렬한 확인이 된다. [해설: 김흥규]


참고 자료


서정주의 삶과 문학

    1. 출생 및 성장  

1915. 5.18.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마을에서 출생. 호는 미당(未堂: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 는 뜻). 다츠시로 시즈오는 그의 창씨개명시 이름. 일제시대 창씨개명해 근대교육을 받은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하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 한학을 배우다 줄포공립보통학교 진학 후 졸업,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보결로 입학한 후 2학년 때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30년 구속됐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됨. 편입한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도 권고 자퇴당하는 등 학교 생활은 평탄치 못했음. 중앙불교전문학원(동국대 전신)수학(1935-1936). 젊은 시절 정신분열증세를 보인 적도 있었으며, 자살 미수사건도 있었음. 1933년 [동아일보]에 시<그 어머니의 부탁>을, [시건설(詩建設)] 7호(1935.10)에 시 <자화상>을 발표하며 등단.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 당선(1936),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오장환, 이용희, 함형수 등과 시전문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 주재. 해방 후 좌우익 대립의 혼란시에 순수문학 또는 순수시라는 개념을 내걸고 우익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1946), 시분과위원장을 역임하며 당시 문단을 주도한 좌파의 계급문학 또는 경향문학에 반대하여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섬. 남조선대(동아대) 창립시 교수(1946), 동아일보 사회부장 및 문화부장, 정부수립후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1948), 조선대 부교수, 서라벌예대(동국대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의 전신)교수, 동국대 교수(1959-1979) 및 종신교수,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멤버로 시분과위원장, 1954년 예술원 창립과 함께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고 한국문협 부이사장(1969-1972) 및 이사장(1977), 한국현대시협회장(1970-1974) 역임. 아세아자유문학상(1955), 대한민국 예술원상(1966), 중앙일보 문화대상 본상(1980)수상.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추천(5차례) 됨. 서정주 시전집(2권. 민음사) 출간(1991). 부인 방옥숙(方玉淑)씨 별세(2000.10)이후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명하다 2000.12.24. 13시 서울 강남 삼성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85세). 재미 변호사와 재미 심장 전문의인 승해(升海)와 윤(潤) 두 아들을 둠.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선영에 묻힘. 정부는 12.26 고인에게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함.

    2. 활동 및 작품경향

생명파(인생파) 시인으로 사상기조는 영원주의(영생주의), 문화사조상 격정적 낭만주의, 예술관은 심미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전통적 서정세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토착적인 언어의 시적 세련을 이루었고, 시 형태의 균형과 질서가 내재된 율조로부터 자연스럽게 조성된 점 등이 커다란 문학사적 성과로 평가된다. 생전에 자신의 시세계를 스스로 생명파, 또는 인생파로 규정하고 1949년 「조선명시선」을 편찬하여 ≪시인부락≫과 ≪생리≫의 동인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면서 이들은 인간 본연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고 말함. 그는 고향의 원초적 서정과 외국의 문학세계의 영향을 받아 30년 대를 풍미한 김기림과 이상의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를 극복 대상으로 삼는 한편 20년대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니체로 이어지는 신성과 초인정신에 대한 관심, 보를레르와 이백이 강조했던 인간의 질곡과 자연의 시심, 유.불.선의 동양사상과 샤아머니즘 및 전통정신사상을 두루 섭렵하고 광범위한 문학적 체험을 거쳐 김영랑의 순수시와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강한 애착을 보이며 민족전통과 정신의 세계를 형상화하였다. 첫시집 <화사(1938)> 에서부터 마지막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1997)> 에 이르기까지 정열적으로 새로운 시세계를 일궈내 해외에 대표 한국시인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시의 학교', '시인 중의 시인', '큰 시인들 다 합쳐도 미당 하나만 못하다', '시의 정부 (政府) ' , '한국이라는 부족 언어의 주술사' , '시선(詩仙)'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시의 최고 경지를 일궜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는 동국대 및 서라벌예대 교수로 재직하며 배출한 제자 문인들이 현재 문단의 중추를 이루는 등 많은 시인과 문인제자를 양성 한 몫도 크다 하겠다. 등단 이후 60여년간 미발표작 포함 1천편에 가까운 시를 다산(多産)하였는데 이는 국내에 유례가 없고, 외국에서도 독일의 괴테나 헤르만 헤세 정도가 비견될 정도임. 한국전쟁 후 반공 국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그의 시적 경향이 남한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잡았고, 이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무려 10편 가량의 시가 실리는등 다수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됨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상당히 깊숙한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문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설의 김동리와 비견되는 시문학의 교주(敎主)로 ‘미당 사단’이라는 거대 계보가 형성됐으며 이는 교수시절 기른 이원섭, 이제하, 황동규, 고은, 김초혜 등 수많은 제자와 신춘 문예 등 심사위원으로 등단시킨 문인등이 학계 언론계 및 주류 문단의 중진으로 포진하고 각종 문인협회조직에의 참여와 정권의 비호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룬 결과였다. 일제 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행적으로 반민족 매국친일파로, 해방 직후 친일파를 대거 중용, 정치기반으로 삼는 동시에 반공을 국시로 한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사, 대통령 당선축하 축시헌사, 광주항쟁과 전두환정권 수립 와중에 TV방송에 출연해 행한 전두환 (全斗煥) 군사파쇼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등의 정치 참여로 일제 및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불명예와 “아부와 굴종”이라는 지탄 및 반민중 반민주 친독재 야합인물로 불리는 오점을 남김.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공인함. 국내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 대상이 됐고, 과거의 시 세계도 빛이 바램. 문학교육 현장에서도 부정적 인식이 확산돼 국정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잇따라 배제됐으며 검인정 교과서도 일부만이 제한적으로 수록됐다. 이 때문에 자신이 추천한 시인 고은씨 등이 차례로 등을 돌린데 대해 서운함을 털어놓기도 했으며. 그의 와병을 계기로 일부 계간지와 언론이 미당의 부끄러운 과거와 문학과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를 벌이는 등 그의 평가와 관련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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